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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본의 밤장인수의 <신앙시 산책>
장인수  |  영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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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7  10: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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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시 산책 18

 

헨리 본-

 

요한복음 2, 3장

 

그 순수한 성처녀의 사당과

당신의 영광스런 정오를 내리덮은 성스러운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반디불빛 비추듯 보면서 살아가며,

달과 마주하고 있다.

현명한 니코데무스는 밤에 그로 하여금

그의 신을 알게 만들었던 그러한 빛을 보았다.

 

가장 축복받은 신자인 그는!

어둠의 땅에 거하며 안 보이는 눈을 가진,

당신의 오랜 기대의 치료의 날개를 볼 수 있었고,

당신께서 일어났을 때,

더 이상 이루어 질수 없는 그 무엇으로,

태양과 한 밤중에 이야기 했었다!

 

오, 그 누가 내게 이야기 할 것이며, 죽음과

고요의 시간 속 그 어디에서 그는 당신을 발견했었던가!

어떤 성스러운 인적 드문 땅이 그렇게

희귀한 꽃을 맺었으며

그 성스러운 잎 속에선

신성함의 충만이 누워있구나.

 

금으로 된 자비의 좌석이 아니고

죽어서 재가 된 체루빔 천사도, 조각된 돌도 아니요,

다만 그의 생동하는 일들이 나의 주를 잡고는

홀로 투숙케 한다;

어디에선가 나무와 풀들이 바라보고 엿보며,

놀라워하고 있다, 유태인이 잠자고 있는 동안.

 

사랑스런 밤이여! 이 지상세계는 패배한다;

어리석은 짓의 멈춤; 근심하는 마음의 조심과 억제;

성령들의 날; 나의 영혼의 고요는 방해

받지 않은 채 후퇴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기도 시간;

높은 천국에서 종이 울리는 시간.

 

신의 고요함과, 탐색하는 飛上;

내 주의 머리가 이슬로 가득할 때, 그리고 모든

그의 머리채가 밤의 맑은 방울로 젖어 있을 때;

그의 고요하고 부드러운 부르심;

그의 두드리는 시간; 성령들이 그들의 친절한

동반자를 발견할 때 영혼의 무언으로 바라본다.

 

악의 날들에 나의 모든 외침은 마치

당신의 어두운 장막처럼 인기척도 없이 고요하다,

일부 천사의 날개나 소리에 의한 것 말고 평화는

거의 찢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천상에 있던 나는 그 오랜 세월을

간직하게 될 것이고, 이곳을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태양이 모든 것을 깨우는

곳에 살아가면서, 그들 자신과 다른 이들이

모두 혼합되고 지치게 하는 곳에 살면서, 나는 동의하고

그리고 여러 수렁으로 달려간다.

이 세상의 잘못 오도되어 비치는 빛에 의해서

밤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실수를 저지른다.

 

신에게 있어서는 (어떤 이가 말하길)

깊지만, 눈부신 어둠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사람이

그것이 늦고 어스름하다고 말한다. 왜냐면 그들은

모든 걸 명확하게 볼 수 없기에;

오 그 밤을 위해서! 그 안에 있는 나는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살 것 만 같다.

 

 

 

Henry Vaughan-The Night

 

John iii 2

 

Through that pure Virgin-shrine,

That sacred veil drawn o'er thy glorious noon

That men might look and live as glow-worms shine,

And face the moon:

Wise Nicodemus saw such light

As made him know his God by night.

 

Most blest believer he!

Who in that land of darkness and blind eyes

Thy long expected healing wings could see,

When thou didst rise,

And what can never more be done,

Did at mid-night speak with the Sun!

 

O who will tell me, where

He found thee at that dead and silent hour!

What hallowed solitary ground did bear

So rare a flower,

Within whose sacred leaves did lie

The fulness of the Deity.

 

No mercy seat of gold,

No dead and dusty Cherub, nor carved stone,

But his own living works did my Lord hold

And lodge alone;

Where trees and herbs did watch and peep

And wonder, while the Jews did sleep.

 

Dear night! this world's defeat;

The stop to busy fools; care's check and curb;

The day of Spirits; my soul's calm retreat

Which none disturb!

Chirst's progress, and his prayer time;

The hours to which high Heaven doth chime.

 

God's silent, searching flight:

When my Lord's head is filled with dew, and all

His locks are wet with the clear drops of night;

His still, soft call;

His knocking time; The soul's dumb watch,

When Spirits their fair kindred catch.

 

Were all my loud, evil days

Calm and unhaunted as is thy dark Tent,

Whose peace but by some Angel's wing or voice

Is seldom rent;

Then I in Heaven all the long year

Would keep, and never wander here.

 

But living where the Sun

Doth all things wake, and where all mix and tire

Themselves and others, I consent and run

To every mire,

And by this world's ill-guiding light,

Err more than I can do by night,

 

There is in God (some say)

A deep, but dazzling darkness; As men here

Say it is late and dusky, because they

See not all clear;

O for that night! where I in him

Might live invisible and dim.

이 시는 요한복음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 영생에 이르게 되는 방법을 묻고 그에 대해 예수와 대화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여 거듭나야한다는 사실과 물과 성령으로 다시금 태어나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빛의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사람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만 살고 있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

본의 시 전편에 흐르는 자연신비주의는 그 결론이 신의 세계로의 복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신의 세계를 느끼고 그리고 그 안에서 신의 세계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본의 시가 보여주는 기본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또한 본은 그 신의 세계의 복귀를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해석하면서 우리가 그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다시금 그 세계로 돌아간다, 또는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를 해석한다.

본이 해석하는 신의 세계의 복귀는 빛과 어둠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는 빛의 이미지를 통해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그리고 어둠의 이미지를 통해 지상의 세계를 그려주고 있다. 그러나 본의 자연신비주의의 중심은 이 빛과 어둠의 이미지 모두가 공존해야만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빛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어둠을 필히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본은 어둠의 이미지의 중심에 밤을 위치해 놓고 있다. 한낮을 보내고 밤을 맞이한 인간들은 그 밤을 보내야만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밤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닌 긍정을 지향하는 또 다른 긍정의 의미로서 그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다. 밤은 천상으로 가려는 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의 삶 속에 필요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1연에서는 사람들이 빛을 망각한 채 달과 마주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어둠이란 일단 표면적인 어둠이다. 사람의 가시권을 침해하여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명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는 사실은 밤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밤에 찾아왔다는 것이 니고데모가 밤의 의미를 열게 해 주는 열쇠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빛을 보았다. 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만났다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연에서 그려지는 순수한 처녀 사당의 상징성과 그리고 성스러운 베일의 상징성은 밤의 의미와 깊은 연관성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이것은 밤이라는 자연의 현상이 하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비밀이란 바로 밤의 역설적 의미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처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묘사하는 것이다. 구원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성모 마리아는 구원의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카톨릭에서 성모마리아를 숭상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의 숨겨진 역할자로서의 성처녀는 밤의 비밀을 잉태한 상징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한 성스러운 베일 역시 밤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묘사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가려진 부분 뒤에 있는 것은 바로 구원을 이루는 밤의 역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2연에서는 밤에 예수를 찾아 온 니고데모야 말로 진정한 밤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축복 받은 자라고 말해주고 있다. 사실 그도 어둠의 땅에 거하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 거듭남의 비밀을 알았고 예수를 만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한밤중에 태양과 이야기했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3연에 이르면 죽음의 이미지가 서서히 부각되고 있고 지상이라는 어둠의 이미지가 빛의 이미지로 나아가는 하나의 패턴이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죽음과 고요의 시간에서야 만이 예수를 만날 수 잇다는 것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신성함의 이미지가 보여 지고 있다. 이 지상도 역시 신성함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꽃은 본래 지상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장면도 역시 지상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신성함의 잎들이 무성하다는 것은 지상의 것이 천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4연에 이르면 그 동안의 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시인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 것도 그것을 증명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다만 예수에 의한 빛의 이미지만이 그 일을 수행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유태인이 잠자고 있다는 것은 그 동안의 유태교의 잘못된 교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더 강했기 때문에 어둠의 이미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바로 이점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고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 5연에서 완전히 밤의 의미를 부각시켜주고 있다. 사랑스런 밤이여, 라는 것은 바로 밤의 또 다른 역할을 시인이 인식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밤의 또 다른 역할은 천상세계로 향해 가는 게이트의 역할이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밤이라고 시인은 표현한다. 지상세계의 패배는 곧 밤의 세계가 다가온다는 것이고 그 지상세계의 패배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는 단계가 된다는 사실이다. 서서히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지상세계의 패배를 여러 가지 형태로 보여 지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 멈춰지고, 성령의 날이 다가오고. 영혼의 고요의 후퇴는 곧 왔던 세계로의 회귀를 복귀를 의미한다. 종 울림은 시간을 알리는 계시이다. 와야 할 시간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6연에서는 밤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어져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주의 머리의 이슬은 인간 구원의 고뇌와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보여주고 물의 이미지를 통해서는 인간 구원의 상징적 이미지로도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성령의 역사가 그려진다.

7연과 8연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으로써 밤으로부터 서서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그려준다. 새 세계로의 입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어차피 태양 아래에 거주하고 있음을 그려줌으로서 밤을 통과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수렁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 서글프게 그려지고 있다. 지금 세상을 비치는 빛은 잘못된 오도된 빛이라는 것이다. 참 빛을 보고 그리고 그 빛을 통해 밤을 통과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한다. 시인을 이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마지막 9연에서 나타나는 눈부신 어둠이란 바로 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밤의 신비를 그려준다. 밤을 통과하지 않으면 새벽을 맞을 수 없듯이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의 세계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시인은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 살아 어둠도 신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것이기에 신에게도 어둠이 있는데 그것은 .눈부신 어둠이라고 말한다. 멋진 역설적 표현이다. 어둠이 눈이 부시다는 메타포는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그런데도 지상의 사람들은 그 눈부신 어둠을 보지 못하고 세상적인 어둠속에 묻혀 명확하게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하니 밤 속에 있는 지상적인 나 역시 보이지 않게 살고, 희미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삶을 묘사한다.

이 시는 1655년 판의 마지막 부분에 있어 시인의 시적 사상의 종합편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제목이 밤이라고 하는 상징성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 왔다는 요한복음 3장 2절의 말씀을 배경으로 그려지면서 밤이 구원의 전조가 된다는 예표가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본의 시적 사상의 결론이라고 하는 전능자와의 연결(contacta essencia)과 죽음으로 새로운 삶을 얻는다.(By dying I gain a new life)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허메틱 사상이 모두 종합하여 나타난다. 신플라톤주의는 빛의 이미지와 낮과 밤의 이미지로 구현되고, 허메틱 사상은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의 구원의 피’로 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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